응원합니다

  • 쉬어가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입니다. 본 게시판과 상관없는 게시물은 운영자가 삭제할 수 있습니다.
작성자 이 창 대
제목 내고향 어신
작성일자 2015-02-27
조회수 2111
추천수 535




내 고향 어신 1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예천에서 남쪽으로 30여리 떨어진 시골 마을 어신이라는 곳이다. 동네 가구 수는 20여 호 밖에 되지 않으나 이웃 동네에 비하면 비교적 빨리 개화된 농촌 마을이다. 동네 가운데는 신작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었고 신작로의 양옆을 따라 집들이 뜨문뜨문 늘어서 있다. 동네는 작으나 정미소, 소금가게, 담배 가게, 잡화 가게, 양조장, 사과 과수원 등이 있어 가까운 동네로부터 필요한 생필품을 사가는 중심 마을이었다. 우리 집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마당도 제법 넓게 차지하고 있다. 마당 앞에는 바로 논으로 연결되어 있고, 앞쪽에는 작은 산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주변 산간에는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고 대부분의 동네는 우리 동네 보다 훨씬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인 입지 조건으로 우리 마을이 중심 기능을 맡고 있어 우리 동네를 들락거리는 주민이 많았다. 그러나 규모가 큰일들은 읍내에 있는 5일장에서 해결하며 여기서는 주로 농산물과 생필품이 유통된다. 특히 사과 과수원은 경북에서 꽤 커서 여름에는 밤에 무리를 져서 보리쌀을 준비해 와 사과와 교환하여 과수원에서 먹기도 하고 나머지는 집에 싸들고 가는 모습을 한 여름에는 자주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이웃동네 주민들은 서로 만나서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특히 양조장이 있어 주막집이 여러 곳에 있고 밤이 늦을 때에는 술주정하는 순박한 시골 농부를 자주 본다.

 

내가 처음에 학교를 갈 때는 교실이 없어 우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제사에서 공부를 하였다. 교실이 없다가 보니 아버지가 학교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여, 나는 여섯 살에 학교를 출입하였다. 일찍이 학교를 가게 된 것이다. 좁은 제사에서 합반으로 공부를 하다가 보니 마루 바닥은 뛰어 노는 학생으로 늘 시끌벅적하였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학교생활을 하다가 우리 동네 아래에 위치한 야산 어귀 모퉁이에 학교를 새로 지어 그 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 지은 학교는 흙으로 만든 집이었다. 책상이 없어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엎드려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이 부족하여 교실을 흙벽돌로 반으로 나누어 두반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장난이 심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녀 다시 수업을 할 때는 뻘 먼지가 교실을 가득 채운다. 어느 장마 진 날에는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다가 중간 벽돌담을 밀어서 벽돌담에 깔리는 일 까지 생겼다. 그러다가 목조 교실이 들어섰을 때는 마치 궁전에서 공부하는 기분으로 환호하기도 하였다. 운동장은 학부모들에게 일정량의 품을 배당하여 산을 깍아서 평지에 메꾸는 무보수 부역으로 넓혀 나갔다. 여기에는 건국 초기의 개척적인 사명감을 갖는 참된 교육자 안 승한 교장 선생님이 있어 가능하였다. 지금도 그 교장 선생님은 내 생애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분으로 남아 있다.



 

한편 우리시골 주민은 너무나도 무지하고 가난하여 아들을 학교 보내는데 소흘히 하였다. 우선 농사일 시키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교육에 대해서 무관심하였다. 선생님이 일일이 학부모를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학생을 입학 시켰다. 그러다가 보니 같은 학년인데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형들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저학년 때는 형들이 머리가 먼저 깨우쳐 나보다 공부를 훨씬 잘 했다. 그리고 나는 왜소하니 형들한테 이유 없이 해꾸지 당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저학년 때 공부를 잘 못하였다. 그러다가 보니 안 교장 선생님한테는 늘 얼굴에 붉은 도장이 찍히게 되었다. 숙제를 내었는데 답이 틀리면 매 보다 네모난 큰 도장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게 하여 창피를 느끼게 만드는 교수법이다. 답이 맞으면 노트에다가 도장을 쿡 찍어 주어서 기분 좋게 만든다. 나는 산수를 공부를 하는데 답을 어떻게 얻어내는가를 몰랐다. 어머니에게 몇 번 물어보아 배워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혼자 답을 어떻게 얻는가를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다. 그래서 수의 규칙적인 배열을 찾아내 보기도 하였다. 공부를 못하면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는다. 특히 성적표에 부모 도장 받아오라고 할 때가 가장 불안할 때다.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준비하여 오라고 하였고 나는 몸소 준비한 회초리로 맞기도 하였다.



 

이 때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터라 다들 너무나도 가난하였다. 없는 사람은 산에 가서 야생 뿌리로 생계에 보탬을 하기도 하고 굶기도 한다. 가난할 때라 뭐니 뭐니 하여도 먹는 문제가 급선무였다. 학교에 가면 도시락을 싸 온 학생은 별로 없고 그나마 도시락을 싸온 학생의 도시락을 들여다보면 밥은 약간이고 주먹만 한 감자나 고구마가 중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찬은 주로 된장이며, 고추 찜이나, 마늘 잎사귀 찜이 들어 있으면 고급이다.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한 학생은 교장 선생님의 집에서 만들어 준 주먹밥을 비위생적인 손으로 받아들고 허기를 때우기도 하였다. 우리 집은 시골 치고는 부유한 집안이라 구호품이 배급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열심히 먹는 교우의 모습을 보고 침이 삼켜져 먹고 싶을 때가 있어 얻어먹었다가 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하였다.



 

이름 비밀번호
※ 한글 1000자 까지만 입력가능 :